실버순장성지순례주기철목사순교기념관

by 김경숙 posted Nov 2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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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목사 약력  
               
                이병희장로님이 쓰셨습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로 평양감옥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은 1897년 11월
25일 경남 진해시 웅천면 북부리에서 주현성장로의 7남매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어릴때 부터 부모님 따라 자연스레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고향에서 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오산학교는 이승훈 장로가 설립했고 조만식 장로가 있어 강한 애국심을
가르쳐 주었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여 2학년에 다니는데 백내장으로 휴학하고 귀향하여 쉬고 있는데
웅천교회에서 신유의 능력을 나타내던 김익두 목사님을 초청 부흥집회에
참석 시력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그때 주기철은 순간 자기 몸을 주님께 바치기로 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
1926년 30세의 나이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에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후 1931년에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마산문창교회로 옮겼다. 문창교회는 날로 부흥하였다.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청빙이 왔다. 청빙위원으로 오산학교의
은사였던 조만식 장로가 내려와 간곡한 부탁이었다.
청빙역시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산정현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1938년 2월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주목사는 완강히 거절하자 주목사를 검속하였다.
그 후에도 2차 3차 검속이 있었다.
1938년 제27회 장로회총회에서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으로 참배할수 있다고 가결되었다.
그 뒤에는 형사들이 주목사를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고 따라다니듯이 하였다.
1940년 8월 주목사는 다시검속되었다.

1941년 3월 20일 평양노회가 모여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 파면을
결의하였다.
그때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주목사의 뒤를 따르겠다고 함으로
교회의 문을 못질하였다.
1941년 11월 평양노회는 주목사가족을 교회사택에서 쫓겨냈다.

1944년 4월 어느날 오정모사모님이 면회갔을 때
주목사는 " 나는 더 견디기 힘들것 같소 팔순 노모와 어린 자식들을
부탁하오" 당부하였다.
그리고 몇일 뒤 1944년 4월 20일 평양감옥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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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목사님의 생가인 용인에 소재한
모교인 웅천교회는 1900년 5월20일 설립되어  1세기가 지나오는 동안
일제의 탄압과 숫한 어러움속에서도 믿음의 신조를 지켜 훌륭한 순교자를 배출한
아름다운 고신의 증인된 교회로서 오성환담임목사의 사역과  교회를 사랑하는 400여명의 성도들이 출석하는 교회로 크게 성장되어있다.

교회지하에 주기철목사순교기념관을 개설하여 초교파를 막론하고  전국에서
많은 성도들이 성지순례 하는 마음으로 찿아와 믿음의 선배들의 자취를
느끼며 감격하고 있다

촬영/편집/김경숙권사

찬양 /저 높은 곳을 향하여